본문 바로가기

독서이야기/인문

新 人間革明 15권 제2장.. 소카대학교(2)


2. 대학건설의 파이오니어


... 1971년 5월 9일, 여자부 구기대회가 끝난 후..구내 식당에서 여자부 대표들과 함께..

"소카대학교는 학생을 위한, 학생 중심의 대학이란다. 그러니까 '내가 주체자다. 주역'이라고 정하고 모든 문제에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임해야 한다.
아직 설비도 완벽하지 않고 의지할 만한 선배도 없다. 학생회도 없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서는 필설로 다 하기 어려운 고생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중에 이어질 후배들을 위해 그 가시밭길을 개척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다. 지금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고생하여 개척한 길은 남는다. 1기생의 이름도 영원히 남는다. 여러분이 모두 소카대학교의 창립자다. 나와 똑같단다."




... 소카대학교 야구부의 대학리그 가맹..

2부 춘계 리그전에서 첫 경기는 엄청난 점수차로 졌다. 그렇지만 두 번째 경기에서 첫 승을 거두고 이후 계속해서 승리하여 2부에서 2위가 되었다. 승리의 기쁨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불타올랐다. 기필코 계속하여 승리하자고 모두가 결심했다.

승부의 세계는 엄격하게 마련이다. 때마침 컨디션이 좋아 이긴 경우가 있었다고 해도 진정한 실력이 없으면 계속해서 이길 수는 없다. 절호의 상태에서 기세가 붙었을 때에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쉽다. 진짜 실력은 최악의 상태를 맞은 때라도 착실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힘이다.


소카대 야구부는 1974년 추계 리그전에서는 3승 3패 1무로 진전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야마모토 신이치는 11월 하순, 연습 중인 야구부원들을 격려하러 운동장을 찾았다.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군요. 오늘은 내 소중한 보물을 야구부에게 맡기려고 왔습니다.
이것은 올 시즌에 LA다저스 홈런왕이 된 선수의 야구방망이입니다. 그리고 공과 유니폼 한 벌이지요. 여러분이 간직해 주세요. 야구부의 보물로 후배에게 물려 주었으면 합니다.
내게는 세계 각계에서 제1인자로 활약하는 우인이 많이 있습니다. 소카대학교도 또한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봉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건 그렇고, 경기에서 석패하는 이유는 방심, 즉 긴장이 풀려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이기고 나서 투구 끈을 단단히 매라'는 말이 있는데 소카대 야구부는 '지더라도 투구 끈을 단단히 매라'는 정신으로 하면 어떨까요.
또 경기는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적으로 성장하고 인간으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후 탄생한 슬로건 "인간 승리의 야구부"..


... 위기에 몰렸을 때는 모두 심기일전하여 분발해야 합니다. 이는 야구 경기에서든 인생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에서 지는 경우에는 상대에게 지기 전에 자신에게 지고 만 상태이게 마련입니다. 압박감이나 상황에 져서는 안 됩니다. 그 때야말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더욱 더 투지를 불태워야 합니다."




... 또, 1기생 중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했던 사람이나 다른 대학에 다니던 학생도 많은 까닭에 연령차도 컸다. 그런 만큼 깊은 대화가 활기를 띠었다.
'소카대생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소카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들 수 있는가'와 같은 주제로 열기를 띤 논의가 밤새도록 이어지는 경우도 흔했다.
타성에 젖어 목적을 잃어버린 그런 기숙사생에게 "너는 무얼 위해 소카대에 왔느냐!"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형처럼 엄하게 질타하는 같은 방 친구도 있었다.

집에서 보내 주는 돈이 얼마 안 되어 등록금 납부 기한이 다 된 날에도 내지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모두가 응원했다. 당일 임금을 받는 고수입 아르바이트를 소개하거나 고향에서 보내 온 야채와 쌀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기숙사생 몇 명이서 대학 측에 '납부 기한을 연장해 주었으면' 하여 직접 담판하러 간 경우도 있었다.

기숙사 생활은 학업면에서도 커다란 촉발이 되었다. 특히 국가시험을 목표로 하는 멤버 등은 서로 좋은 경쟁자가 되었다.
'오늘 밤도 그 애 이상으로 공부하자. 그 애가 잘 때까지 절대로 자지 말자!'
이렇게 서로 결의하며 묵묵히 공부했다.


대학 건설의 파이어니어로서 이 사명에 생명을 불태우는 사람은 결코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대학 직원들 역시 필사적이었다.

개교 준비를 하는 직원들 중에 대학 사무직원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루하루가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어 나가는 듯한 상태였다. 학생 모집 요강이나 수강 안내서를 만드는 방법조차 몰랐다. 다른 대학이나 자신의 출신 대학에 가서 머리를 숙이며 가르쳐 달라고 청한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도 소카대학교만이 가능한 최고의 것을 만들고자 끝까지 노력했다.
그런 마음을 지탱해 준 것이 신이치의 말이었다.
"대학교 직원은 배로 말하자면 기관실입니다. 기관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멈춰 버리면 배가 움직이지 못합니다. 누가 보든 말든 직원이 분발하여 최고의 대학을 만들어 주십시오."

직원들은 창립자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일어섰다.
초창기에는 직원들의 일손도 적었던 까닭에 자신이 담당한 부문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하지 않고서는 그 다음으로 진척이 되지 않았다. 교무처에 적을 두고도 조경 작업을 하는가 하면 화장실 청소도 했다. 불평할 틈도 없을 뿐더러 불평을 늘어놓을 상대도 없었다.
'소카대학교는 야마모토 선생님의 이상이며 인생을 건 대학이다. 나도 함께 그 이상을 향해 전진한다. 선생님을 대신하여 이 대학을 기필코 끝까지 지키고 말겠다!'
이렇게 직원들은 맹세했다.
모두 24시간 학생들과 함께 하겠다는 각오를 굳힌 터였다.
그래서 학생처장 등도 대학 근처에서 하숙했다. 또 많은 직원들이 학생 전체의 얼굴과 이름, 출신지 등을 기억했다.




... 수업 외에 학생들과 독서회를 갖는 젊은 교원도 있었다. 또, 학생의 진로나 인생의 참모습 혹은 연애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상담에 응했다.
늦잠 자다 아침 수업에 자주 빠지는 기숙사생이 있으면 깨우러 가서 하루하루 생활의 소중함을 차근차근 지도하는 교원도 있었다.
대학에는 교원 숙소가 있는데, 생활비 송금이 끊어지거나 돈을 다 써 버린 학생은 식사 때에 교원의 숙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교원도 학생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교원들은 온 가족이 학생을 환영하며 식사를 대접했다. 그 중에는 라면이나 통조림을 챙겨서 보내는 교원도 있었다.
그 모습에는 교수와 학생의 흐뭇한 유대가 있으며 '대학 가족'의 따스함이 있었다.




대학 건설의 파이어니어로서.. 창립자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바로 내가 주체자다"라는 사명에 불타오르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오래 전 나약하고 어리광만 부리다가 끝나고 말았던 나의 대학생활이 부끄러워졌다..

이런 청년들이 모인 대학이라면.. 이런 청년들의 후배들이 다니고 있는 대학이라면.. 나의 아들 '정호'도 소카대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다.